현직 국정원 직원이 증인으로 나오다 보니 법정에는 가림막이 늘 등장했다. 그 가림막 너머에서 증인들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말했다.

‘선거법 무죄’에서 기자들이 탄식하더라

‘원세훈 재판’은 1년 넘게 진행됐다. <시사IN>은 재판 내내 참석해 증언 내용을 기록하며 ‘법정 중계’를 해왔다.
법정 중계를 담당했던 기자들이 선고 직후 한자리에 모였다. 길었던 1심 재판을 두고 할 말이 많았다.

김은지 기자

1년 넘게 ‘원판(원세훈·김용판)’ 법정 중계를 담당했던 기자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2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선고 이후 7개월 만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선고가 난 9월11일 이뤄진 이번 방담도 취재기자들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처리했다. 닉네임은 김하영씨 등 국정원 직원이 ‘오늘의 유머’(오유) 사이트 등에서 쓴 아이디에서 따왔다.

추천내놔라잉 : 원세훈 전 원장 선고 날 현장 분위기는 김용판 전 청장 선고 때와 비슷했다. 선고 후 자신을 호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법정을 황급히 빠져나가다 기자들과 뒤엉켰다.

선동반대 : 원 전 원장 때가 더 심했다. 통상 피고인은 기자들이 대기하는 프레스 라인에 와서 선고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원 전 원장은 정해진 문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원 전 원장 옆에 서 있는 ‘어깨’들, 정말 짧은 머리에 덩치가 산만 한 조폭 인상이었는데, 이들이 너무 심하게 기자들을 밀쳤다. 법원 경위까지 넘어졌다. 기자들의 항의를 받고 상황을 정리해보려던 이동명 변호사가 원 전 원장에게 다가가자, ‘당신 뭐냐’며 큰소리를 쳐서 이 변호사가 머쓱해 물러나기도 했다.

추천내놔라잉 :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김 전 청장 때는 사복경찰이 호위를 했다. 이동명 변호사 말이 자기들도 모르는 보수 단체 사람들이라고 하던데, 보수 단체에서 왔느냐 국정원이냐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선동반대 : 그 사람들이 하도 밀어대니까 기자들도 소속사 불문하고 ‘곤조’가 돌았다. 카메라 기자들이 원 전 원장을 코너에 몰아넣은 다음, 사실상 감금 취재를 했다(웃음). 마이크 7~8개를 들고 있던 여자 풀(기자 대표) 기자를 밀어버리자, 나중엔 남자 풀 기자가 원 전 원장 목 뒤로 팔을 걸어 마이크를 들이댔다. ‘어깨’와 함께 인상적인 사람이 원 전 원장의 부인이었다. 매번 재판에 나왔는데, 집행유예 선고를 받자 웃음이 만면에 돌더라. 그러면서 원 전 원장이 감금 취재를 당하고 있는데도 변호사에게 “우리 차 어디 있어요?” 묻더니 차 타러 가더라.

추천내놔라잉 : 법정에 들어갈 때 1층 검색대에서 몸수색까지 했다. 법원 취재를 수년 다녔어도 몸수색은 처음 당했다. 들어갈 때부터 깐깐하게 하는 걸 보면서 ‘무죄인가’ 싶더라. 무죄에 항의하는 방청객을 미리 점검하는 건가 싶어서.

응답없음1997 : 나는 재판부가 증거를 다 날리는 식으로 무죄를 낼 줄 알았다. 지난해 말 한창 증거 능력 문제를 가지고 검찰과 변호인이 씨름할 때, 검찰이 밀리는 분위기였다. 결국 핵심 증거였던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으니까.

선동반대 : 법조 기자들도 줄타기 판결은 예상했다. 이범균 부장판사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무죄를 주었으니, 원 전 원장에게는 유죄를 주는 ‘줄타기’를 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선거법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아킬레스건이라서 이걸 어떻게 판단할지 기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국정원법 위반 부분 판결을 먼저 읽었는데, 워낙 센 워딩(표현)이 나와서 선거법까지 유죄가 나나 싶었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 부분을 읽을 때 몇몇 법조 기자들은 탄식을 하더라. 양형 사유까지 원세훈 전 원장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걸 보고, 법조 기자들은 ‘짜맞추기’ ‘자판기’ 판결이라는 반응이었다.

반대는비수 :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국정원 직원에 대한 환상 아닌 환상이 깨졌다. 정보요원이라면 뭔가 날카롭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상상하지 않나. 그런데 웬걸, 증인으로 나오는 국정원 직원마다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어찌나 하던지, 그런 기억력으로 어떻게 나라 안보를 책임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거의 이메일도 안 쓰고, 트위터가 뭔지도 잘 모르고, 자신이 근무한 기간도 명확하게 모르고, 자기 아이디조차 기억이 안 나는 요원들이었다. 이범균 부장판사도 지적할 정도였다.

응답없음1997 : 게다가 증언할 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재판부의 지적을 받은 사람도 꽤 되었다. 현직 국정원 직원이 증인으로 나오다 보니, 법정에는 재판석과 방청석 사이에 가림막이 늘 등장했다. 그 가림막 때문인지 더 목소리가 안 들려서 재판 내용을 노트북에 받아 적을 때 힘들었다.

반대는비수 : 반복되는 기억상실증에 개미 목소리를 듣다 보면 졸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웃음). 그중에서도 스스로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인정했던 안보5팀(트위터 담당) 김 아무개 직원은 아직도 안 잊힌다. “30여 년 공직 생활을 했지만 검사님만 보면 사지가 떨려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고, 트위터를 했던 장소도 잘 기억이 안 난다면서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유랑자처럼 그냥 아무 데나 돌아다녔다”라고 했다(웃음).

추천내놔라잉 : 그와 대비되었던 증인은 안보3팀(커뮤니티 담당) 김하영 직원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차게 증언했다. 댓글 사건의 당사자라 경찰, 검찰 수사부터 국정조사까지 받으며 여러 차례 관련 진술을 해봐서 그런지 굉장히 노련했다. 원 전 원장을 변론한 이동명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지금까지 나온 증인 중에 제일 똑똑하다”라며 김씨를 칭찬할 정도였다.

반대는비수 : 국정원 직원의 증언 중에는 ‘말 말 말’ 감도 여럿이었다. 안보3팀 5파트장 이 아무개씨는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있냐는 검사의 질문에 “(여자 연예인) 엉덩이 나온 사진 이런 거 보면 관심 있고”라고 대답했다. ‘오늘의 유머’ 연예 게시판에서 한 찬성·반대 클릭에 대한 물음이었는데, 저런 발언을 했다. 취재하던 여기자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동반대 : ‘오유’ 하니 이호철 증인도 생각난다. 오유 운영자인 이씨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밝혀낸 숨은 주인공이다. 사건 초기 국정원은 정치 관여 댓글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오유에서 활동한 흔적이 나오니 오유가 종북 사이트라고 공격했다. 거기에 열받은 이씨가 김하영 직원이 쓴 글을 다 찾아서 언론사에 제보했고 검경 수사에도 협조했다. 재판 때도 변호사가 오유가 편향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이씨는 “일베에서 그렇게 말한다”라며 일갈한 적도 있다(웃음). 이씨는 대학 때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특정 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평범한 시민이다. 처음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국정원 직원 같다며 신경을 썼고, 배달도 안 시킨 생수가 집으로 오기도 했다며 힘들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사를 적극 도왔다.

추천내놔라잉 : 증인도 많았고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재판이 길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타자 실력은 향상된 것 같다(웃음). 원래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부에서는 노트북 사용이 안 된다. 재판장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데, 재판이 열리기 전 기자단이 허락을 받아내 조금이나마 재판 취재가 수월했다. 노트북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아마 법정 중계가 불가능했을 거다.

응답없음1997 : 검찰이 1차 공소장을 변경하며 추가 기소한 트윗 5만5600여 건이 증거로 제출되면서, 변호인이 그걸 엑셀 파일로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종이에 인쇄된 채로 증거를 주니 일일이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형철 부팀장이 엑셀 파일이 첨삭되거나 변경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주기 힘들다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엑셀 파일을 확보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이 언론에 언급되고 있다”라는 말을 덧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속으로 좀 웃었다. 우리 기사(<시사IN> 제320호 ‘박근혜 실언할 때마다, 조직적 방어 트윗’)를 가리킨 거 같은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웃음). 박 부팀장이 안심해도 되는 게, 검찰 어디서도 엑셀 파일이 유출된 적은 없다. <시사IN>도 국회 법사위원에게 제공된 프린트물 5만5600여 건을 입수했고, 그것을 일일이 엑셀에 입력했다. 완전 노가다였다. 최대한 빨리 해야 분석할 수 있다고 쪼는 팀장 덕에 아르바이트생 40명과 함께 이틀 만에 해냈다(나중에 팀장은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털어놓았다). 들어간 알바 비용만 400여만 원이니, 꽤 비싼 기사인 셈이다(웃음). 알바에 동원된 상당수는 엑셀에 쳐서 넣어야 할 양에도 지치지만, 그 너저분한 비하 발언을 보고 있으니 더 피곤하다고 했다. 입력 아르바이트한 사람 중에는 이후에 기자가 된 사람도 있다.

선동반대 : 언론의 법조 취재라는 게, 주로 검찰 기소 단계에 맞춰져 있다. 검찰이 누구를 수사하고 있고 기소할 거라는 소식 하나하나가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이슈가 되지만, 정작 재판 과정은 제대로 보도가 안 된다. 전체 사실이 100이라면, 검찰 단계에서는 10~20밖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는 나머지 사실에 대해서는 그동안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정원 재판의 지면 중계를 기획했고, 이 실험이 의미 있었다고 자평한다. 국정원 직원들의 발언이 어떻게 바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날것 그대로의 법정 발언을 가져와서 보여주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했다. 법정 내부 사진 촬영이 되지 않아서 서혜주 작가가 매번 법정에 들어가 내부 스케치를 했다.

응답없음1997 : 그런 자료 덕분에 디지털 프로젝트 페이지 ‘응답하라 7452(http://nis7452.gabia.io/)’ 페이지도 만들었다. 오픈 첫날은 사이트가 다운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국정원 댓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은 언제나 찾아주시면 된다. 아직 2심, 3심이 남아 있다.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의혹 사건’ 1심 판결문(201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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